소소한 일탈/서울 벗어나기

강릉 선교장

눈부신 봄날 2013. 6. 20. 20:56

 

선교장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상류층 살림집으로.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이주하며 지은 집이다.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 호수는 논이 되었고

대장원의 뒤 야산에 노송의 숲과 활래정의 연꽃

그리고 멀리보이는 백두대간 사계절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는 운치는 한국 제일이라고 한다.


 

 

 

300여 년전 안채를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등이 들어섰는데,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자연과 어울리도록 건물들이 독립적으로 잘 배치되어 있다.

큰대문을 비롯해 12대문이 있어 규모가 넓고 품격이 있다.

안채는 동편에 있으며 구조는 ㄱ자 형. 동쪽 끝에 부엌이 있고 서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인 열화당 사이에는 담을 쌓아서 막았다.

남쪽에 행랑채, 서쪽에 사랑채로 출입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명당인 지금의 선교장 자리를 점지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입구의 활래정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도 바라볼 수 있어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조선의 선비와 풍류객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열화당...

열화당(悅話堂)은 남자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이다.

이 건물은 1815년(순조15) 이후(李厚, 鰲隱處士)가 건립한 건물이다.

건물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귀거래사(野去來離)」22)의 구절에서 연유하였는데

“삼형제가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싶다[悅親戚之情話]”는 의도를 담고 있는데,

즉 ‘전주이씨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건물 앞 동판(銅板)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遮陽)시설을 두어 햇빛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채양시설은

조선말기 러시아식의 건축물로 러시아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 준 것이었으나

최근에 합성수지(F.R.P)기와를 덧씌웠으나 곧 원래상태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에 전주이씨 가의 삶 터전으로 개기되면서 창축된 건물이다.

우측에 동별당, 서측으로 서별당과 이어져 있는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한 건물이다.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따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안채 앞쪽으로 안뜰이 있고,

그 뒤로 대청과 방, 우측에 방과 부엌이 있다.

 

 

안채 부엌...

 

 

동별당...

경농 이근우가 1920년에 건립한 건물로서,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가족들간의 단란을 위하여 이 집에 찾아오는 많은 친척이나 외척 등 내객들과 접하는 공간으로

외부와 분리하도록 건축되었다.

즉 전주이씨 가문의 주인으로서 가족들과 함께생활할 수 있는 안채에 접근된 거처이다.

 

사당...

 

안채에서 나와 바라본 모습...

 

 

 

 

외별당.....

맏아들의 신혼살림이나 작은 아들의 분가 이전에 사용하던 건물이며 손자들도 사용하였다.

 

외별당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활래정(活來亭)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이다.

안채와 격리된 별당인 옥외공간에 만들어진 건물로

전면 돌출된 누마루 부분이 연못안에 설치된 돌기둥으로 받쳐 놓은 루(樓)형식으로 건물이다.

 

 

아직 연꽃은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활래정으로 들어가는 문... 월하문(月下門)...

이름이 낭만적이다.

 

 

 

선교장은 집이라기보다는 마을이라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숙박도 가능하다고 하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이용해봐야겠다.

 

선교장 홈피(http://www.knsgj.net)

 

 

2013년 6월 8일 강릉 선교장에서